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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현지인의 숨겨진 여행지 23편> 야마구치 현 해안 마을의 작은 숙소 '모루' 이야기일본 현지인 여행지 2025. 7. 12. 12:55
야마구치 현 해안 마을의 작은 숙소 '모루' 이야기
일본 현지인의 숨겨진 여행지 23편으로 오늘은 작은 게스트하우스에서 겪었던 조용한 밤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커피를 마시며 파도소리를 음미하고 낯선 이들과 온기를 나누었던 특별한 경험속으로 지금부터 떠납니다.
조용한 바닷마을로 목적없는 여행을 시작하다
유독 아무 것도 하기 싫은 날이 있다. 그날이 그런 날이었다. 회색 도시의 분주한 소음이 귓가를 어지럽히고 시간은 나에게 곁을 주지않고 마치 화살처럼 스쳐지나가는 말그대로 정신없는 날.
필자는 여행지를 정하지 않은 채 일본 지도를 꺼내 무작위로 써치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발견한 곳이 야마구치 현(山口県)이다.
우리나라 한반도를 마주보고 있는 서쪽 바다의 야마구치현과 그 안에서도 더 깊은 끝자락에 위치한 사람이 많지 않을 것 같은 조용한 해안마을이 눈에 띄었다. ‘호후(防府)’라는 이름의 해안 마을은 그렇게 오늘의 여행지가 되었다.숙소를 검색해보니 거의 나오는 곳이 없었는데 딱 한 곳 카페 겸 게스트하우스 사이트에 짧은 설명이 떠 있었다. 게스트하우스 이름은 '카페 모루(喫茶もる)'로 해 질 녘의 바다를 배경으로 한 사진 몇장과 단 한 줄의 소개문이 실려 있었다.
< 카페 모루, 조용한 바닷마을에 머물고 싶은 분들을 위한 곳입니다 >
필자는 올커니 외치며 예약 버튼을 눌렀고 그로부터 몇일 뒤 저녁 야마구치행 신칸센에 몸을 실었다.
해안마을 골목 끝에서 '모루'와 처음 만나다
호후역에서 내려서 바라본 마을은 생각보다 더 작았다. 택시도 버스도 거의 없었다. 필자는 숙소까지 걸어가기로 결심하고 가방을 둘러메었다. 20분 가량 걸었을 즈음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너머 낮은 언덕 아래 나무로 된 2층짜리 건물에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곳이 바로 필자가 밤을 보낼 ‘카페 모루’였다.
카페의 문을 열자 잔잔한 재즈 음악이 들리면서 커피 향이 가볍게 코끝을 스쳤다.
“어서 오세요. 오늘 예약한 손님이신가요?”
사장으로 보이는 중년의 한 여성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씩씩하면서도 따뜻한 그 말에 필자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카페는 한쪽으로 테이블이 3개가 있고 다른 쪽에 좁은 나무 계단이 있었는데 계단은 2층으로 이어져있고 그 위로 올라가면 소박한 게스트룸들이 있다고 했다.
게스트룸으로 올라가 짐을 내려놓고 다시 아래층 카페로 내려오자 사장님이 핸드드립 커피와 수제 마들렌을 건네주었다.
“한번 드셔보세요. 이건 서비스랍니다. 오늘도 바다가 참 예쁜데 다 드시면 나가서 바다도 보세요”
필자는 얼른 커피 잔을 들고 카페 뒤편으로 나가보았다. 카페 뒤로 정원이 있있고 좁게 난 길은 바다로 이어져 있었다.
바다와 함께 존재하는 숙소
카페 모루의 가장 큰 장점은 바다와의 거리였다. 정원의 끝에서 몇 걸음만 나가면 방파제가 있고 그 너머로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하늘이 맞닿아 있다. 저녁 무렵이 되자 붉은 노을이 수면을 덮고 파도가 출렁이며 잔잔한 리듬을 만들었다. 그 순간 모루가 단순한 숙소가 아니라 마음이 잠시 쉬어가는 공간임을 깨달았다.
잠시 바다와의 데이트를 마치고 게스트하우스 안으로 돌아와 2층 방으로 올라가 보았다. 게스트하우스답게 방은 작았는데 다다미 4장 반 크기의 공간에 책상이 있고 전기 포트와 메모가 놓여 있었다. 메모에는 '필요하신 것은 언제든 말씀 주세요'라고 쓰여 있었다.
작은 창문을 열자 바람이 살랑 불어왔다. 창틀에 말린 라벤더를 담은 향주머니가 놓여 있었고 천장은 목조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나 있어 멋스러웠다. 현대적인 아름다움이나 편의시설은 없었지만 곳곳에 사람 손이 닿은 흔적이 매우 정겨웠다.
모루의 밤, 낯선 사람들과의 조용한 대화
카페 모루는 저녁 8시가 되면 문을 닫는다. 그리고 이제 게스트하우스 손님들을 위한 공용 공간으로서 사용할 준비를 한다. 밤늦게까지 즐길 수 있는 프라이빗한 공간인 것이다. 그날은 필자를 제외한 두 팀의 손님들이 있었는데 혼자 여행을 온 30대 여성과 대학생 커플이었다.
카페 사장님은 작은 조명만을 켜두고 밤과 흑설탕을 넣어 달인 밤차를 직접 만들어 주셨다.
“낯선 곳에서 처음 본 분들끼리 말을 나누기 쉽진 않지만 이 공간은 늘 열려있으니 대화가 필요하시면 편안하게 하세요.”
조용히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며 시간이 흐르자 머뭇거리던 여행객들은 서로에 대해 자연스레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그냥 바다가 보고 싶어서 무작정 찾아보다가 알게 됐어요.”어떤 목적이나 의미없는 낯선 사람들과의 그저 편안한 대화가 때로는 위로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된 밤이었다.
햇살과 바람, 집밥으로 맞이한 상쾌한 아침
아침 7시쯤 창문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에 자연스레 눈이 떠졌다. 자명종이나 알람 같은건 일절 없었다. 그저 창틈으로 바닷 바람이 불어오고 새소리 퍼져나갈 뿐이었다. 이렇게 상쾌한 아침을 맞이한게 언제였던가.
1층으로 내려가자 사장님이 작은 나무 쟁반 위에 아침을 차려 주셨다. 갓 지은 흰쌀밥에 된장국, 바다 근처에서 잡은듯 신선한 생선구이와 집에서 만든 무 조림, 달걀말이까지 소박하지만 풍성한 아침 한상이었다.
여행 중에는 소화가 잘 되는 밥이 꼭 필요하다는 사장님 말씀에 필자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밥을 한 숟갈 떴다. 어느 식당에서 먹어보지 못했던 귀한 대접을 받는 듯한 흡사 어머니가 차려주시는 집밥처럼 따뜻한 그 음식에 피곤함이 모두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 한 끼가 시들어가던 내 온몸을 깨우는 듯했다.
잠시 머물렀던 공간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조용하고 편안한 밤과 상쾌한 아침을 보낸 후 짐을 챙겨 나오는 필자에게 사장님은 작은 편지 봉투를 건네주셨다.
그 속엔 조그마한 드라이플라워와 함께 손글씨로 쓰여진 짧은 메모가 들어 있었다.
이곳에는 언제나 조용히 걷기 좋은 당신만의 바다가 있습니다.
여행은 끝났을지라도 가끔 이곳에서 보낸 시간을 떠올리며 행복하시길필자는 말없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숙소를 나섰다. 돌아가는 길에 만난 고양이 한 마리가 마을 길 한복판에 평화롭게 누워 있었다. 그 고양이 옆을 천천히 지나 처음 마을을 맞이했던 작은 전철역으로 향했다.
카페 모루는 그냥 숙소가 아니었다. 마치 어릴적 잠시 살았던 동네처럼 온몸으로 살가운 공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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