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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현지인의 숨겨진 여행지 24편> 일본 시골기차 신에츠 본선의 낡은 간이역에서 보낸 느린 하루일본 현지인 여행지 2025. 7. 13. 09:47
일본 시골기차 신에츠 본선의 낡은 간이역에서 보낸 느린 하루
일본 현지인의 숨겨진 여행지 24편은 시골기차 여행입니다. 바람과 기차 바퀴 소리만 들리던 역에서 오래도록 멈춰 있었던 느리디 느린 여행 이야기를 이제부터 시작합니다.
신에츠 본선의 조용한 간이역 나카고역으로의 출발
어디로 떠나야할지 여행의 목적지를 정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지만 어떻게 가야할지 여정 자체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가끔은 여행의 수단으로서의 여정 자체를 목적으로 두고 싶을 때가 있다. 볼거리나 행선지에 대한 계획 없이 그저 움직이고 싶을 때 필자는 기차를 떠올린다. 그런 이유로 이번에는 오래된 간이역에서 하룻동안 머물게 되는 아주 특별하지 않은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도쿄 도심에서 너무 멀지 않고 당연히 사람도 붐비지 않는 낡은 간이역이 있는 노선으로 여행 조건에 딱 맞아떨어지는 곳은 바로 신에츠 본선(信越本線)이다. 이 노선은 나가노와 니가타를 이어주고 있는데 과거에는 일본 산업화를 이끈 중부 내륙 중심선 중에 하나였지만 지금은 쇠퇴의 길을 걸어 대부분 느린 로컬 열차와 소박한 역들로 구성되어 있다.소박한 그 역들 중에서 필자가 향한 곳은 오쿠보역(荻野駅)과 모토야마역(本山駅)의 사이에 위치한 조용한 간이역 나카고역(中郷駅)이었다.
느린 경주마 신에츠본선
나가노역에서 시작한 여행은 신칸센을 타고 금새 목적지에 도착했지만 진짜 여행은 그 이후부터였다. 로컬 열차의 플랫폼은 예상대로 한적했다. 기차는 단칸이었고 문은 수동으로 열어야 했으며 기차내에 광고도 거의 없었다.
기차가 출발하자 창밖으로 보이던 도심의 풍경이 서서히 사라지고 산과 논밭, 여기저기 흩어진 농촌의 집들이 하나둘 눈에 띄기 시작했다. 속도는 정말 느렸다. 창밖의 풍경을 고스란히 느끼기에는 오히려 그게 훨씬 좋았다.
기차가 철로 위를 경주마처럼 내달렸고 자리에 앉아 눈을 감으니 길 위가 아니라 시간 위를 달리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창밖 너머로 스쳐가는 풍경은 조금씩 나에게 스며들어왔다. 그렇게 어느새 기차는 조용히 나카고역에 멈춰섰다.
시간이 멈춘 나카고역에서 쓴 편지
나카고역의 플랫폼에 내리자 기차는 떠나갔고 필자 혼자 남겨졌다. 사람이 아무도 없는 무인역답게매표소도 전광판도 없다. 도심의 소란스러운 역과는 상반되는 무인역에는 오직 나무 벤치와 손으로 쓴 시간표 하나만 붙어 있었다.
이끼가 낀 지붕과 살짝 휘어진 기둥으로 그 세월을 짐작할 수 있는 역사(驛舍)는 목조로 지어진 작은 건물이었다. 그 한 켠에 마을 사람들이 손으로 써서 남겨놓은 메시지 카드가 가득했다.
- 아무도 없는 것 같아도 여기서 매일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요
- 기억이 날땐 잊지말고 다시 와주세요
필자는 조용한 기차 역사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시계는 이미 멈춘지 오래된 듯했고 누군가 마련해놓은 빈 종이와 연필이 놓여 있었다. 그 순간 마치 홀린듯 연필을 집어들었다. 여기 내 마음의 한 조각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조용하지만 쉼이 없는 기차와 사람들
나카고역을 나와 마을이 있는 방면으로 걸어내려갔다. 사람도 없지만 집도 드물었고 시끄러운 소리는 커녕 소리 자체가 거의 없었다. 바람이 논밭을 스치고 전깃줄 위에 새가 몇 마리 앉아 있을 뿐이었다. 음료수라도 사고 싶어 두리번거리다가 찾은 가게는 단 하나 이름 없는 식료품점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할머니 한 분이 반갑게 인사하셨다. 필자는 음료수 하나를 집어 들며 물었다.
“여기는 기차가 하루에 몇번이나 오나요?”
“몇 번 오진 않아요. 기차 타는 사람도 드물지요. 그래도 역은 꼭 열어둬요. 그게 우리 마을의 약속이랍니다.”그 짧은 대화를 통해 필자는 이 낡은 역이 여전히 보존되고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기차는 가도 다시 오고 사람도 다시 오는 이 마을의 하루 하루가 멈추지 않고 계속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역과 함께 보낸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
강렬한 햇빛을 비껴간 오후 3시에 필자는 다시 역으로 돌아왔다. 하루에 몇번 오지않는 기차는 한참 뒤에나 올 예정이었다. 그 기다림의 시간을 필자는 그냥 보내기로 했다. 나무 벤치에 앉아 가져온 책을 읽다가 졸음이 오면 잠시 졸다가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플랫폼을 걷기도 하고 다시 앉아 책읽기를 반복했다.
낡은 역의 바닥에 작은 단풍잎 몇 개가 굴러다녔다. 필자는 낙엽을 밟지 않으려 그 위를 조심스럽게 지나면서 문득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달았다.
어떤 남자가 자전거를 끌고 역을 지나가다가 필자를 보며 말을 걸었다.
“여기서 이렇게 오래 있는 사람은 드문데. 혹시 기차 시간을 모르시나요?”“아니요 그냥 가만히 있고 싶어서요.”
"아 그런거라면 여기가 최고의 장소죠.”
다시 도시로 돌아오는 길 마음 한켠에 간직한 간이역
어느새 마지막 기차가 역에 들어왔다. 기차는 변함없이 느리고 조용했다. 플랫폼을 떠나기 전에 필자는 마지막으로 역사 안에 들어가 노트에 글을 남겼다. '0000년 00월 00일 오늘 나카고역과 함께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하루'
기차가 서서히 출발하자 필자는 점점 멀어지는 역을 보이지 않을때까지 바라보았다. 사라진 것도 남겨진 것도 없는 그 작은 역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돌아가는 길에 필자는 여행은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나 자신을 마주하는 행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기차는 한참을 달려 나가노역에 도착했고 도심의 소음이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문득 나카고역의 정적과 낡은 나무 의자의 온기, 플랫폼 위에 떨어져있던 단풍잎이 떠올랐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 비어 있던 그 시간들이 도시에서의 속도와 소음을 감당할 수 있게 해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또다시 마음이 복잡해지고 시간이 너무 빠르게 느껴질 때면 필자는 다시 느린 열차를 타고 고요한 그 간이역으로 향할 것이다. 어떤 말도 필요 없는 그저 가만히 있기만 해도 되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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