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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현지인의 숨겨진 여행지 29편> 아키타현 눈축제보다 특별한 야간 설경 여행
    일본 현지인 여행지 2025. 7. 18. 14:39

    아키타현 눈축제보다 특별한 야간 설경 여행

    일본 현지인의 숨겨진 여행지 29편으로 축제의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눈꽃이 깃든 길을 따라 말 없는 걷는 특별한 경험을 하고자 합니다. 빛과 함께 걷는 밤의 진풍경을 선사해줄 이번 여행을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일본 현지인의 숨겨진 여행지로 아키타현의 야간 설경 코스 체험에 대한 이야기

     

    축제를 벗어나 조용한 밤 산책 코스를 찾아서

    처음 아키타현을 방문한 건 눈 축제 때문이었다. 요코테 카마쿠라(横手かまくら) 축제는 하얀 돔 속에서 촛불이 은은히 타오르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풍경을 선사했지만 축제답게 사람이 너무 많고 여기저기 플래시가 번쩍이는 탓에 다소 정신이 없는 경험으로 남았다. 축제 특유의 활기 속에서 필자는 혼자만의 조용한 설경을 감상하고픈 갈망이 생겼다. 그때의 경험을 듣고있던 현지인 친구가 조용히 속삭이며 말해준 이야기가 있었다.

     

    "시끄러운 축제가 싫다면 너에게 딱맞는 특별한 눈길이 있어. 아는 사람만 가는 밤 산책 코스인데 진짜 설경을 볼 수 있지.”

     

    몇년 뒤 머릿속에 남아있던 그 이야기를 따라 필자는 다시 아키타를 찾았다. 이번에는 축제때문이 아니라 친구가 말해준 야간 설경 코스를 걷기 위해서였다.

     

    설경이 살아숨쉬는 자연을 보기 위해 모로요시산으로

    아키타현 야마모토군의 안쪽에 위치한 모로요시(森吉)는 낯선 지명에 관광 지도에도 보이지 않는 곳이다. 그러나 이곳엔 모로요시산 설경 산책로(森吉山雪の回廊)라는 비공식 야간 걷기 코스가 분명 존재한다. 이 코스는 현지의 숙박업자나 산악 가이드들이 일정 시기에만 소개하는 코스로 한정기간 운영되고 있다. 따라서 산책길이 정식으로 개장되어 여러 사람에게 오픈되거나 여행객이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게 조명으로 장식되는 일도 없다. 설경이 살아 숨쉬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 안을 속속들이 걷는 체험인 것이다.

    그 경이로움 체험을 하기 위해 필자는 아키타역에서 전철로 1시간 반을 이동해 아니마에역(阿仁前田駅)에 도착했다. 거기서 마을버스를 타고 30분을 가고 버스에서 내려서는 도보로 이동했다. 그리고 마침내 조용한 마을의 작은 료칸에 닿았다. 그곳의 주인인 할아버지가 알려준 모로요시 야간 설경 코스는 저녁 7시부터 시작해 약 90분간 걷는 밤산책 코스였다.

     

    불빛이 없는 고요한 눈길 속으로

    저녁 6시 반이 되어 필자는 료칸 앞으로 나섰다. 료칸 앞에는 이미 눈이 무릎까지 쌓여 있었다. 방한복을 단단히 챙겨입고 가이드가 건넨 헤드랜턴 하나와 스노우슈즈를 착용했다. 이 코스의 특징은 불빛이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가로등도 없고 민가와도 떨어져있어 볼 수 있는 빛이라고는 오직 흰 눈과 달빛뿐이다. 그리고 필자가 눈을 밟고 지나가는 발소리만이 동행한다.

    처음엔 이 고요한 적막이 좀 무섭기도 했지만 10분 정도 지나고 나자 조용함이 머릿속과 마음을 차분히 달래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무 위로 눈꽃이 소복히 내려앉아 있고 길 위로 쌓인 눈 위에는 여우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필자는 손전등마저 끄고 잠시 멈춰섰다. 그 순간 하늘에서 눈이 내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세상의 소리가 모두 차단되고 눈송이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소리가 되어 느껴졌다. 진짜 설경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유키노이케 연못에 비친 달빛으로 빛나는 얼음

    그렇게 눈길을 40분쯤 걸었을 때 앞서가던 가이드가 나지막이 말했다.


    “곧 작은 호수가 나올겁니다. 아마 지금까지 봤던 눈중에서 가장 예쁠거에요.”

     

    이 겨울에 그것도 눈길 사이에 호수가 있다니 의심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잠시, 나무들 사이로 반짝이는 얼음판 같은 것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곳은 바로 유키노이케(雪の池)라는 작은 연못으로 겨울엔 완전히 얼어붙지만 낮 동안 얼음 표면 위에 내린 눈이
    달빛을 받아 거울처럼 반사되는 공간이었다. 필자는 말문이 막혀 조용히 연못 앞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눈이 소복소복 내리고 있었고 달빛이 얼음 위에서 반짝거렸다. 귓가에 부엉이의 짧은 울음소리가 스쳐지나갔다. 그 순간은 어떠한 말도 필요 없는 완전한 고요함뿐이었다.

     

    오늘 나만을 위한 길의 마지막

    밤산책 코스의 끝은 료칸 아래의 온천 배관이 지나는 작은 오솔길이다. 그 길은 온천 배관을 따라 따뜻한 온천수가 흐르기 때문에
    눈이 살짝 녹아 있었다. 가이드가 따뜻한 유자차를 건네주며 말했다.

     

    “오늘 보신 설경은 매일 매일 볼때마다 달라요. 오늘 본 풍경이 내일에는 없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이곳은 오늘 당신만을 위한 길이 되는거죠.”

     

    그 말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필자는 유자차의 따뜻함으로 몸을 데우고 오늘 나만을 위한 그 길을 마지막까지 천천히 걸었다.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길 위에서 눈과 빛과 바람이 만든 단 하루의 무대를 마음껏 즐기며.

     

    조용한 료칸 방에서 깊어져가는 밤

     

    료칸으로 돌아오니 방에 이불이 깔려있고 그 위로 난로의 온기가 퍼져 있었다. 창문 너머로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지만 방안은 따스했다. 필자는 손이 얼어붙었지만 한시라도 빨리 기록하고 싶은 마음에 노트북을 꺼내 오늘의 기억을 천천히 써 내려갔다.

     

    '오늘 나는 누구와 대화하진 않았지만 어떤 날보다 많은 것들을 보고 들었다. 눈이 내리는 소리와 나무의 숨결 그리고 내 몸을 가득 채운 마음의 소리까지'

     

    글을 쓰자마자 스르르 금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아키타에서의 밤은 그렇게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다시 가고픈 그 길을 그려보다

     

    밤산책을 마치고 도쿄로 돌아온 후에도 필자는 종종 그 밤의 설경이 문득 문득 떠오른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시끌벅적한 축제도 좋지만 아무도 없는 곳을 찾아가 눈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내 삶의 기초를 다시 다지는 재정비의 시간이 되는 것 같다. 그것은 경험으로 끝나는 여행이 아니라 삶의 정화에 가깝다. 

    다음 겨울이 되면 꼭 다시 그 길을 걷고 싶다. 그리고 그땐 누군가를 초대해 함께해도 좋을 것 같다. 아키타에는 눈축제보다 더 특별한 눈길 설경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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