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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현지인의 숨겨진 여행지 28편> 사람보다 토끼가 많은 히로시마 우사기섬 여행기일본 현지인 여행지 2025. 7. 17. 16:54
사람보다 토끼가 많은 히로시마 우사기섬 여행기
일본 현지인의 숨겨진 여행지 28편으로 오늘은 토끼를 찾아 떠납니다. 조용한 바닷길 너머 귀를 쫑긋 세우고 기다리는 귀여운 존재들을 찾아 그들과 보낸 즐거운 섬여행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이름만으로도 궁금해지는 우사기섬(大久野島)
처음 우사기섬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필자는 마치 그 이름이 별칭같았다. 정식 지명과는 다른 별칭 또는 옛부터 내려오는 지명같은 느낌이랄까. 그런데 실제로는 오쿠노지마(大久野島)라는 정식 지명을 일본 지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그곳은 여행객들 사이에서 우사기섬(うさぎ島)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런 별칭을 같게 된 이유는 단순한데 섬 전체에 수백 마리의 야생 토끼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익히 알려진 힐링 스폿 중 하나지만 외국 여행객에게는 아직 낯선 곳이다. 우사기섬은 히로시마에서 조금 벗어난 외곽에 위치해 있는데 단순히 동물을 구경한다는 개념을 넘어 사람과 동물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또한 과거 전쟁의 아픔까지 담고 있는 섬이라는 사실을 알고 어떻게 그것을 보존하고 있는지 궁금했기에 여행을 결심하게 되었다.도쿄에서 다다노우미 항구까지
우사기섬은 히로시마현 다케하라시 인근의 바다에 떠 있는 작은 섬이다. 도쿄에서 신칸센을 타고 미하라역(三原駅)까지 약 4시간가량을 이동하고 거기서 다시 JR 가이타선으로 갈아탄 후 20분쯤 이동하면 다다노우미역(忠海駅)에 도착한다. 다다노우미역 앞에는 작고 조용한 시골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마을의 해안선을 따라 5분 정도 걸으면 다다노우미 항구가 나오는데 바로 오늘의 목적지인 우사기섬으로 떠나는 페리가 출발하는 곳이다. 이 페리는 하루 약 10회 운항하는데 편도로 15분 정도면 섬에 닿을 수 있다. 15분의 짧은 항해 동안 필자는 이미 도시로부터 멀어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페리는 물살을 가르며 나아갔고 섬으로 다가갈수록 흐릿하던 섬의 윤곽이 또렷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촛점을 맞추어보니 선착장 근처에 작은 귀를 쫑긋 세운 토끼들이 하나둘 눈에 띄기 시작했다.
야생 그대로의 토끼들 세상
우사기섬에 내리면 가장 먼저 정적속에서 무언가가 다가오는 발소리를 느낄 수 있다. 그 소리는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아니라 바로 토끼들의 것이다. 필자 역시 페리에서 내리자마자 한 무리의 토끼들이 사방에서 달려오는 모습을 처음 보게 되었다. 작은 발을 내달려 다가오는 흰색, 갈색, 회색 색색의 토끼들은 사람을 겁내지 않고 낯선 이방인인 필자에게도 스스럼없이 다가와 킁킁 냄새를 맡는다.
이 섬의 토끼들은 야생 그대로의 모습이지만 마치 사람에게 길들여진 존재처럼 친화적이고 거칠지 않다.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존재로서 조용히 다가와 사람과 눈을 맞추고 그리고 자유롭게 섬을 휘젓고 다니는 존재들이다. 필자는 문득 이섬의 토끼들에게 사람이라는 존재가 어떤 의미일지 궁금해졌다.
렌즈로 담을 수 없어 눈 속에 담은 진풍경
선착장 인근의 작은 매점에서는 토끼 전용 먹이인 펠릿을 판매한다. 그리고 토끼에게 주기 위해 다다노우미역 근처에서 야채나 과일을 미리 준비해 오는 여행객들도 많다.
그렇지만 막상 섬에 도착하면 먹이를 주는 것은 잊고 그저 토끼들을 바라보는 것에 집중하게 된다. 풀숲 사이에서 낮잠을 자는 토끼도 있고 작은 돌 위에 올라가 먼 바다를 바라보며 앉아있는 토끼도 있고 나무 밑에서 서로 몸을 부대끼며 시간을 보내는 토끼들도 있다. 그 모습들은 도시에선 찾아볼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날 것의 자연이었다.
필자는 진풍경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꺼내들었다가 다시 넣기를 몇번이나 반복했다. 하지만 결국 찍지 못했는데 렌즈로 담기보다 눈으로 기억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평화로운 섬 풍경 속에 남겨진 전쟁의 흔적
우사기섬은 단순히 토끼와의 교감을 위한 장소가 아니다. 사실 이 섬은 과거 일본 육군의 화학무기 공장이 있었던 비밀 장소이다. 일제강점기부터 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이곳에서는 각종 실험과 무기 창고가 가동되었었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한동안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았다. 지독히 비밀스러운 과거가 지금은 공개되어 그 자리에 오쿠노지마 독가스 자료관으로 공개되어 운영되고 있다.
오쿠노지마 독가스 자료관의 내부에는 당시 사용한 병기 관련 자료와 사진, 피해자들의 처참한 인터뷰 기록이 전시되어 있다. 귀여운 토끼들이 가득한 이곳에 참혹한 과거가 있었다는 사실이 대비되어 아이러니함이 느껴졌다. 이 조용한 섬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고 남은 상처와 교훈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필자는 자료관을 나서며 다시 토끼들이 뛰노는 해변으로 걸어갔다. 생명은 그 자체로 소중하며 과거의 기억을 뛰어넘어 현재 이곳은 평화로움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토끼와 함께하는 섬 한 바퀴
우사기섬을 삥 둘러 한 바퀴 돌고나면 약 1시간 반 정도가 소요된다. 해안선을 따라 조성된 산책로에는 작은 전망대와 폐허가 된 벙커, 바다를 마주보고 있는 벤치들이 차례로 나타난다.
산책로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은 해 질 녘의 바다를 배경으로 토끼 두 마리가 나란히 앉아 있는 풍경을 마주했을 때였다. 어떠한 연출도 조작도 없는 자연의 순수한 모습이었다. 필자는 그 순간을 너무도 간직하고 싶었지만 결국 사진을 찍지 않았다. 말없이 그저 토끼들 옆에 조용히 앉아 보았다. 우사기섬은 볼거리가 많은 섬이 아니라 마음에 와닿는 것이 너무나 많은 섬이다.
돌아가는 페리에서 만난 토끼들과의 인사
다시 다다노우미 항으로 향하는 페리 안에서 짧지만 밀도 높았던 하루를 되돌아보았다. 필자가 선착장을 떠날 때 만난 몇 마리의 토끼들은 여전히 낮잠을 자거나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안녕이라는 인사조차 필요치 않을 것 같았다.
필자는 이 섬을 여행한 후 떠났지만 섬은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 있을 것이고 그 위에 토끼들은 지금처럼 계속 살아갈 것이다. 그 사실만으로도 필자는 깊은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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