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현지인의 숨겨진 여행지 33편> 효고현 산골마을의 폐교 시로카네 아틀리에 방문기
효고현 산골마을의 폐교 시로카네 아틀리에 방문기
일본 현지인의 숨겨진 여행지 33편으로 오늘은 폐교에 찾아갑니다. 모두가 떠나가버린 폐교에 스며든 예술과 사람의 손길이 만든 아름다운 공간 속으로의 여행을 시작합니다.
학교가 있던 자리에 들어선 시로카네 아틀리에를 향해서
도쿄의 일상은 빠르게 흐른다. 평범해보이지만 빠르게 흘러가는 무료한 일상을 살아가면서 필자는 늘 마음 한켠에 아쉬움이 있었다. 잊혀져가는 것들에 대한 애틋함이랄까. 조용히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랄까.
그렇게 잊혀지고 사라져가는 것들 중에 폐교라는 단어가 주는 묘한 끌림이 있다. 폐교는 마치 시간이 멈춘 곳 같은 느낌을 준다. 우연히 일본 다큐멘터리에서 효고현의 북부지역 산골짜기에 위치한 폐교를 보게 되었다. 그곳에 예술가들이 모여 폐교를 리모델링한 뒤 작업실로 만들어 전시를 하고 숙박까지 가능한 예술 복합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는 이야기였다. 예술 공간으로 탈바꿈한 폐교의 이름은 시로카네 아틀리에(白金アトリエ)이다.
학생들의 웃음소리는 사라졌지만 대신 조용한 붓질과 나무 깎는 소리가 채우고 있는 그곳으로 향하기 위해 필자는 망설임 없이 기차표를 끊었다.
작은 마을 ‘가사이시’의 폐교를 찾아서
시로카네 아틀리에는 효고현 가사이시(加西市)의 외곽에 위치해 있다. 오사카에서 전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고서도 작은 단선 열차로 40분을 더 가서 히오카역(日岡駅)에 도착한 뒤 택시를 타고 산길을 가다보면 폐교 한 채가 눈앞에 나타난다.
오래된 나무 외벽은 하얗게 페인트 칠해 깨끗했지만 白金小学校(시로카네 소학교)라고 적힌 커다란 간판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과거에는 70여명 남짓의 학생들이 다녔다는 이곳에 지금은 학생과 선생님 대신 몇 명의 예술가들이 그들만의 작업을 하며 조용히 살아가고 있었다.
학교에서 그림을 그리고 영화를 보고 잠을 자다
필자가 예약한 프로그램은 예술가 체험 숙박 프로그램으로 실제 아틀리에에 하룻밤 머물면서 예술가들과 소통하고 직접 창작을 경험해보는 방식이다.
간단한 체크인 절차를 마치고 필자는 작은 손목 밴드를 받았다. 그 밴드를 차면 마치 놀이동산 프리패스처럼 교실, 도서실, 운동장, 작업장 등을 제재없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다. 가장 인상깊은 점은 필자의 숙소가 옛 교실이라는 점이다. 칠판은 그대로 두었고 책상은 작업 테이블로 바뀌어 있었다. 숙소의 창문을 열면 뒤뜰에 작은 텃밭이 있고 그 사이를 고양이 한 마리가 유유히 걸어다녔다.
저녁에는 학교 체육관에서 소규모 공연이 열렸는데 현지 예술가가 만든 단편 필름이 상영되었다. 모든 것이 여유롭고 자유롭고 조용하며 차분했다. 이제 이곳은 아이들의 함성 대신 조용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아침 햇살과 함께 시작된 예술 작업
교실에서의 하룻밤이 지나고 다음 날 아침 필자는 자그마한 작업 키트를 받았다. 수채화나 목공, 자수나 필름 카메라 중에서 한가지를 선택해 3시간 동안 창작을 해보는 프로그램이었다. 예술을 1도 모르는 필자가 무려 3시간 동안이나 창작을 해야한다구? 과연 몰입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지만 필자는 수채화를 택했다. 처음엔 뭘 해야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가만히 생각에 잠겨있다 고개를 들어보니 교실의 창문 너머로 산 안개와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어떤 것을 그린다해도 혼을 내는 사람은 없다. 간섭하는 사람도 없다. 그저 자연스럽게 붓을 움직이면 되는 것이었다.
옆 교실에서는 목공 작업이 진행 중이었고 도서실에서는 중년 여성이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그 누구도 말을 걸지 않았고 어느 누구도 서두르지 않았다. 이 폐교는 원하는 것을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 휴식처 같은 공간이었다.
점심은 급식으로, 저녁은 함께하는 술자리로
심도있는 예술 작업이 끝나고 아틀리에의 점심은 다소 의외로 급식이었다. 식판 트레이에 담긴 쌀밥과 된장국, 오징어볶음, 야채 반찬으로 마치 옛날 학창시절 급식을 먹던 때를 떠올리게 했다. 놀라운 건 이 모든 식재료를 마을 주민들이 당일 아침에 준비한 것이라는 점이다. 점심을 먹고 난 후에는 직접 급식을 만든 지역 장인이 운영하는 조리실을 구경할 수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급식을 요리로 재해석하는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었다.
밤이 되자 체육관 한켠에 마련된 작은 히노끼 바에서 마을 주민 그리고 폐교를 운영하는 예술가들이 다같이 모여 술을 마시는 시간이 열렸다.
“어디에서 오셨어요? 어떤 경험을 기대하고 오신거에요?”
질문이 쏟아졌고 필자는 나도 모르게
“학교에서 무언가를 다시 배우고 싶어서요.”
라고 말하며 살짝 미소지었다.
지금도 살아있는 학교 '시로카네 아틀리에'
3박 4일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숙박 체험이 끝나는 날 필자는 교실 숙소의 칠판에 오랜만에 분필로 글씨를 써보았다. 학교는 이제 사라졌지만 다시 오게 된 학교에서 많은 걸 배운 것 같았다. 어린 시절의 추억과 기억이 서려있는 교실이 다시 나를 가르치는 공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사라졌을지라도 학교가 가진 힘이 아닐까 싶다.
돌아가는 전철 안에서 필자는 카메라도 핸드폰도 보지 않은채 눈을 감고 시로카네 아틀리에의 고요한 교실에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살아있는 공간의 풍경을 천천히 되새겨 보았다. 학교는 희로애락을 품은 곳이다. 지금은 다소 희미해져버린 기억이지만 그때 당시 느꼈을 온갖 감정의 요동침을 되돌아오는 길에서 반추해보는 새로운 경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