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현지인의 숨겨진 여행지 31편> 홋카이도 농가의 눈 내리는 밭에서 일했던 하루
홋카이도 농가의 눈 내리는 밭에서 일했던 하루
일본 현지인의 숨겨진 여행지 31편은 홋카이도로 갑니다. 홋카이도에서 설경을 보는게 아니라 농가의 눈이 내리는 밭에서 일을 했던 체험을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고요한 눈 속의 하루를 흙과 함께했던 겨울날로 지금부터 떠납니다.
도심의 속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도쿄에서의 삶은 늘 일정하다. 아침 7시 기상해서 8시면 출근 그리고 12시에 점심을 먹고 11시쯤 잠자리에 든다. 정해진 시간의 흐름 속에서 문득 아스팔트 말고 흙을 밟은 적이 언제였던가 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홋카이도 토카치 지역에서 겨울의 농가 민박 체험 프로그램이 있다는 정보를 얻게 되었다.
단순히 여행을 가는게 아니라 노동을 테마로 하는 체류형 민박 체험인데 눈이 내린 밭을 정리하고 동물의 사육을 도와주는 것이라는 말에 필자는 두말 없이 신청을 했다. 이왕 쉬는 김에 아무 생각이 나지 않도록 몸을 움직여보자는 생각과 함께. 그렇게 삿포로보다도 눈이 많다는 홋카이도로 떠나는 여행이 시작되었다.
시라카와 농가에서의 첫 날부터 눈을 퍼내기 시작하다
홋카이도 토카치 지역의 중심부는 오비히로역에서 버스를 타고 1시간 반을 가고 다시 마을 트럭을 타고 하얀 들판을 건너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필자가 한 달간 머무르게 된 시라카와 농가는 도착했을때 이미 계속해서 눈이 내리고 있었다.
민박 주인인 60대 후반의 농부 시라카와 씨는 아내와 함께 농가를 이끌고 있있고 그의 아내는 정성스럽게 따뜻한 국을 끓여 주었다.
도착하자마나 눈삽을 건네주며 오늘은 고구마 밭에 있는 눈부터 걷어내자고 말하는 시라카와 씨의 말에 필자는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정말 내가 일을 하러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묘하게 낯설고 한편으로 반가웠다.
밭에 쌓여있는 눈의 무게는 생각보다 무거웠고 삽질을 몇 번만 해도 팔이 뻐근해졌지만 옆에서 아무 말 없이 눈을 퍼내는 시라카와 씨의 진지한 눈빛에서 이곳 사람들이 하루를 어떻게 견디는지를 알 것 같았다.
마을 사람들의 말 없는 환대
밤이 되어 하루의 피곤함을 씻기 위해 시라카와 농가 근처의 공동 목욕탕에 갔다. 뜨거운 물 속 몸을 담그니 하루 종일 얼었던 몸이 풀리면서 노곤함이 찾아왔다. 이미 목욕탕에는 마을 어르신들 몇분이 와 계셨고 그분들과 조용히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농사 일 해보니 어때요 재미있어요?”
“힘들고 재미있어요.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피로감이에요.”
그들은 필자의 말을 십분 이해한다는듯 미소지으며 내일은 소 먹이 주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다음 날 필자는 새벽 6시에 일어나 헛간에서 젖소에게 줄 건초를 나르고 물통을 갈고 송아지의 상태도 살펴보았다. 모든 순간이
기록하지 않아도 몸과 마음에 선명하게 각인되고 있었다.
추운 겨울 함께 따뜻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의 의미
그날은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 시라카와 씨는 마당을 조용히 지켜보다가 눈이 많이 내리는 날엔 따뜻한 것을 먼저 챙겨야한다며 밭 대신 작은 장작 창고로 향했다. 눈 속에서 나무를 나르는 일은 단순해보여도 집중력을 요하는 작업이었다. 한 번에 옮길 수 있는 양이 정해져 있는데 나무마다 물기와 결이 섞인 작은 무게감이 더해져 있었다.
장작을 날라 아궁이에 넣고 있으니 마을 아주머니 한 분이 손수 만든 팥죽을 가져다주셨다. 하얀 새알심이 퐁당 담겨있는 따뜻한 그릇을 손에 들고 필자는 그들이 말하는 겨울의 맛을 함께할 수 있었다. 추운 겨울에 함께 모여 따뜻한 것을 입에 넣는다는 것은 단순히 생존으로서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시작이라는 것을 그 겨울, 그 마을에서 깨닫게 되었다.
마을에서 배운 잊지못할 소소한 기억들
그 이후에도 눈은 몇차례 더 내렸다. 시라카와씨와 필자, 즉 우리는 닭장을 정리하고 닭들이 얼지 않도록 고무통의 물을 채워주었다.
그때 닭 한 마리가 얼어붙은 발을 달달 떨며 다가왔고 필자는 손으로 닭의 발을 조심스럽게 감싸주었다. 그 순간 돌봄이라는 것이
거창한 무언가가 아니라 한겨울 체온을 나누는 일과 같은 소소한 것이라는 걸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밤이 되면 이곳은 무척 조용했다. 인터넷은 느려터졌고 TV도 잘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필자는 매일 밤 짧은 일기를 써 내려갔다.
‘오늘은 어제보다 눈을 더 많이 걷어냈다. 그러면서 내 마음도 조금 더 가벼워졌다.’
그날의 하루를 정리하는 이 문장을 끝으로 스르르 잠이 들었다.
눈길 위에서 조용히 인사하다
어느덧 이 마을에서 민박을 하는 마지막 날이 찾아왔다. 그날 아침 밭 위에는 유독 전날보다 더 많은 눈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시라카와 씨는 여느 때처럼 새벽같이 일어나 마당에 나와 있었다. 필자가 따라 나가자 그는 작은 나뭇가지를 집어들고 눈 위에 글씨를 적어 내려갔다.
'またいつでも来なさい'(언제든 다시 와도 좋아)
그 글을 본 순간 필자의 마음에 알수 없는 울컥한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침묵만이 흐른 뒤 필자는 가만히 모자를 벗고 고개를 깊게 숙여 그에게 인사를 했다. 그것이 한달 동안 이 마을이 가르쳐준 가장 조용하고 따뜻한 이별의 방식이었다. 농가 민박에서의 체험은 매일 매일이 일로 시작해서 일로 끝나는 어찌보면 단순하기 그지없는 하루였지만 그안에서 만난 사람들은 금새 잊혀지지 않고 오래도록 기억속에 남았다.
도시로 돌아온 지금도 가끔 눈이 내리는 날엔 시라카와 농가의 마당에 쌓여있는 눈을 찍은 사진을 꺼내본다. 그 밭에서 함께 연신 눈을 퍼내던 시라카와 씨의 모습이 가만히 떠오른다. 조용히 삽질을 하던 소리와 더불어 느껴지던 눈의 무게, 시라카와 씨와 눈빛으로 교감하던 그때가 필자에게는 가장 인상 깊은 겨울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