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현지인 여행지

<일본 현지인의 숨겨진 여행지 25편> 일본 미술 애호가들의 성지인 야마나시의 작은 미술관을 찾아가다

tnsekfdl 2025. 7. 14. 14:33

일본 미술 애호가들의 성지인 야마나시의 작은 미술관을 찾아가다

일본 현지인의 숨겨진 여행지 25편은 미술관 탐방기입니다. 작은 공간에 깃든 감정과 예술이 삶과 더 가까워지는 시간을 갖기 위해 야마나시의 작은 미술관으로 조용한 여정을 떠나보도록 할까요.

 

일본 현지인의 숨겨진 여행지로 미술 애호가들의 성지인 야마나시의 미술관 탐방기

 

도쿄를 벗어나 예술을 만나고 싶다는 마음

평소 미술관을 좋아하는가. 필자는 조용히 걸으며 그림을 보고 붓끝에 남은 흔적을 따라 상상할 수 있는 그 시간을 좋아한다.

하지만 너무 유명해서 사람들이 자주 찾는 미술관은 때로는 오히려 피로감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혼잡한 전시실과 여기저기 사진을 찍어대는 사람들 속에서 그림 앞에 선 필자는 그림에 마음을 집중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필자는 더 작고 더 조용한 미술관을 찾아 헤매게 되었다. 그렇게 찾아낸 곳이 바로 도쿄 근교 야마나시현(山梨県)이라는 곳이었다. 야마나시현은 후지산의 맑은 공기가 서려있다. 또 포도밭과 와인의 낭만이 있고 무엇보다 예술이 일상인 소규모 미술관들이 자리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고 필자는 곧장 여행을 준비했다.

이번 여행의 목적지는 야마나시 곳곳에 숨어있는 조용하고 작지만 깊이 있는 미술관 세 곳이다.

 

이치카와 다쿠비 미술관(市川大門美術館)

 

미술관 여행의 첫번째 행선지는 미노부선 이치카와다이몬역 근처에 위치한 이치카와 다쿠비 미술관이다. 작가이자 서예가이기도 한 다쿠비(澤田拓美)가 이지역 출신 예술가들의 흔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작은 전시관으로 그의 작품을 중심으로 전시를 해놓은 공간이다

미술관의 1층은 서예 작품과 수묵화 위주로 구성되어 있고 2층은 다쿠비가 여행 중에 그린 스케치와 에세이 원고가 전시되어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미술관 창밖으로 보이는 후지산의 능선이 작품의 붓선과 이어지도록 구성해놓았다는 점이다. 그가 남긴 말 중에 자연이 붓을 대신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을 미술관에 재연한 듯했다. 

미술관의 관장은 70대의 연륜이 넘치는 노부인으로 이 건물은 작품과 함께 살아 숨쉰다고 말했다. 작품뿐만 아니라 그것을 감싸고 있는 미술관 자체가 지역의 역사를 기억하고 보관하는 공간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야마네코 미술관(やまねこ美術館)

두 번째로 방문한 미술관은 야마나시 시 외곽의 조용한 산길을 따라가면 만날 수 있는 야마네코 미술관 일명 산고양이 미술관이다. 네비게이션을 켜고 찾는다해도 위치를 정확히 잡지 못하는 숲속의 들판에 자리잡은 이 작은 미술관은 일본의 아티스트 부부가 공동으로 만든 곳이다.

외부는 흙으로 만든 벽과 목재 구조물로 이루어져 있는데 입구에 들어서면 신발을 벗어야 안으로 입장할 수 있다. 마치 누군가의 집을 방문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 이웃집 같은 구조였다. 1층은 자연을 주제로 한 회화와 판화가 배치되어 있고 2층은 부부 중 아내가 만든 자수와 일기장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곳은 작품의 완성도보다도 미술관이 주는 감정의 온도가 훨씬 더 깊게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전시를 모두 관람하고나면 허브차가 제공되는데 작은 다다미방에 앉아 차를 마시며 방문객끼리 대화를 나누는 광경을 볼수 있다. 예술이 누군가의 소유물이 아니라 보는 사람들과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무언가라는 것을 체험할 수 있는 특별한 장소였다.

 

야마나시 예술의 숲 갤러리

마지막으로 찾아간 미술관은 야마나시 예술의 숲 갤러리(山梨アートの森ギャラリー )라는 곳으로 이전과는 달리 조금 더 현대적인 감각을 지녔다. 가이시(甲斐市)의 작은 공방 단지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이 미술관은 주로 지역의 장인과 현대미술 작가의 협업을 통한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건물 자체는 일본의 전통적인 창고 구조물을 현대식으로 리모델링한 형태를 지녔는데 내부는 심플하면서 전시된 내용은 도전적인 반전미가 있다.

필자가 방문한 시기에는 ‘흙과 빛’이라는 주제로 도자기 장인과 빛을 다루는 LED 조명 설치 작가가 협업하여 만들어낸 인스톨레이션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흙으로 만든 항아리 안에서 빛이 새어나오는 작품도 있고 작품에 손을 대면 색이 변하는 반응형 조형물까지 규모는 작지만 꽤 인상 깊은 시도들로 이루어진 공간이었다.

가장 놀라운 점은 이곳이 30대 큐레이터들이 속한 비영리 조직에 의해 기획되고 운영되어진다는 점이다. 그들은 지역 작가들이 일회성이 아닌 지속가능할 수 있는 생존에 대해 고민하고 그들이 추구하는 예술의 생산적 실험에 집중하고 있었다. 작품보다 사람의 의지가 더 뚜렷하게 투영된 미술관으로 오래 기억에 남을 곳이었다.

 

예술을 일상의 일부처럼 만든 공간들

세 곳의 미술관은 모두 규모는 작았다. 유명한 작가의 작품도 없었고 미디어에 소개된 적도 거의 없는 미지의 작품들이었다. 그렇지만 필자는 이 미술관들을 돌아보며 예술은 일상의 일부이며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그림이 벽에 걸려 있다는 사실보다 그림을 벽에 건 이유가 더 중요해지는 공간이 바로 세 곳의 미술관의 존립 이유다.
작품을 보고 나오는 길에 자연스레 궁금증과 대화거리가 생기고 작품을 대하는 마음에 진심을 담게 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어쩌면 예술이란 건 큰 도시에서보다 조용한 마을 구석구석에서 더 오래 빛을 발할 수 있는게 아닐까. 야마나시의 작은 미술관들이 그런 의문에 대해 아주 명확한 답변을 해주고 있었다.

 

작은 전시와 그곳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온기

 

도쿄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필자는 미술관 기념품 대신에 그곳에서 받은 작은 전시 엽서 한 장을 꺼내었다. 그리고 노트에 오늘을 기록하는 메모를 적어넣었다. 그리고 작은 전시와 더불어 작품보다도 그곳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의 온기가 더 진한 감동을 주었던 세 곳의 미술관을 떠올리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기차는 빠르게 도쿄를 향해 내달리고 있었지만 마음은 작은 미술관의 여운 속에 잠시 머물러 있었다.